"조선은 금이 땅 위에 노출되어도 캐지 않는 나라"
link  관리자   2021-08-23

한국에 관한 것을 유럽에 전한 최초의 가장 상세한 기록은 마르틴 마르티니가 지은 다. 1655년에 발행된 이 책에 보면
한국에서는 금을 땅 위에서 거져 주울수 있다고 했다.

그 후 한국땅을 다녀간 외국사람들은 금과 인삼에 대해 언급하는 것이 공식처럼 돼 있었던 것 같다.

루벤쯔오프는 그의 탐험기에서 "조선은 금이 땅 위에 노출되어도 캐지 않는 나라"로 소개하고 있고, 켄베르는 "조선땅에 금이 많다는
것은 재론할 나위도 없는 일이다. 문제는 어떻게 왕실과 교섭해서 그것을 캘 수 있느냐에 있다"고 했다.


청나라에도 금이 많은 나라로 소문나 있었던 것 같다. 한국에 사신이 떠난다면 뇌물을 써가면서 수행을 자원하는 바람에 박이 터진
다 했는데, 한국땅을 걷다 보면 지표에서 금이 듬뿍 든 돌을 주울 수 있기 때문이라 했다. 다분히 과장되었을 가능성도 없지 않으나
전혀 무관한 사실도 아니다. 왜냐하면 조선왕조부터 금을 캐지 못하게 하는 엄한 금령이 내려져 있었기 때문이다. 왜 그 많은 국부
를 지표에 노출이 되기까지 사장시켜야 했을까.


인접한 강대국들로 하여금 야망을 품지 않도록, 또 수탈을 당하지 않도록 우리나라를 금이 나지 않는 빈약한 나라로 보이려고 역대
왕실의 정책 때문이었다. 그래선지 유럽열강이 수십 차례 배를 대고 통상을 모색했을 때마다 조정에서는 한결같이 '금은이 나지 않
는 가난하고 볼품없는 나라'라는 것을 반드시 내세우고 있음을 본다.


이같은 슬픈 역사 때문에 우리 한국인은 예로부터 금을 금이라 호칭하지 못하고 '별은' 또는 '은'으로 불렀으며 금을 다루는 곳을 금
방이라 부르지 못하고, '은방'으로 불러 내려왔을 뿐 아니라 금을 지녀도 식구도 모르게 은밀히 지녀야 하는 슬픈 습속이 생겨났던
것이다.

한국인이 남달리 금을 지니기를 좋아하는 이유도 사치심리가 아니라 이 역시 슬픈 역사의 소산이라 할 수 있다.

옛날 우리 한국사람은 일생에 세번 난리와 아홉번의 흉년을 겪어야 한다는 것이 통념이 돼 있었다. 이 열두 번의 인재, 천재을 살아
내기 위한 보험심리가 금을 간직하려는 의식을 체질화시켰고 돌날, 혼인, 회갑 같은 통과의례에 금반지, 금비녀, 금폐물같은 금붙이
를 선물하는 것으로 제도화됐음직 하다.

생략.











배꼽의 한국학
1984년 글








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